2009-02-09

박경리 유고시집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얼마 전 세상을 타계한 박경리의 유고시집이다.

그의 生이 어떠했는지그가 무엇을 느끼며 한 평생을 살아왔는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모습에서 보여지는 그의 연륜과 지혜를한 평생을 마감하는 날 나에게서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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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나를 달래는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우주 만상 속의 당신

내 영혼이
의지 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산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 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사람의 됨됨이


가난하다고
다 인색한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다르다
후함으로 하여 삶이 풍성해지고
인색함으로 하여
삶이 궁색해 보이기도 하는데
생명들은 어쨌거나
서로 나누며 소통하게 돼 있다
그렇게 아니하는 존재는
길가에 굴러 있는
한낱 돌멩이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색함으로 하여
메마르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더러 보아 왔다
심성이 후하여
넉넉하고 생기에 찬
인생도 더러 보아 왔다
인색함은 검약이 아니다
후함은 낭비가 아니다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후한 사람은 늘 성취감을 맛보지만
인색한 사람은 늘 먹어도 배고프다
천국과 지옥 차이다

가을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영구불멸

영구불멸이란
허무와 동의어가 아닐까
영구불멸이란절대적
정적이 아닐까
영구불멸이란
모든 능동성이 정지하는 것
그것은 끝이다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은 한이라 하는가

2008-09-19 naver blog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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