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02

<뇌 2003년 7월호> 3개국어 모국어처럼 ‘통’하는 비법

<뇌 2003년 7월호>

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 최정화 교수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한국 최초의 국제회의 통역사. 파리 통역대학원 박사학위를 아시아 최초로 따낸 여성. 통역 분야의 공로상인 다니카 셀레스코비치상을 최초로 수상한 동양인이기도 한 그녀는 지난 십 년간 한불 정상회담 통역을 전담해 왔다. 그런데 불어, 영어, 한국어 3개 국어를 ‘통’한 ‘언어의 달인’인 최 교수는 대학 졸업 때까지 외국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토종 국내파’라고.

큰 소리로 따라하라 중학교 때 우연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불어를 듣고, 그 아름다움에 반한 것이 불어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최 교수는 불어의 매력에 푹 빠져서 고등학교 때부터 학원에서 불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외대를 거쳐 파리 통역대학원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국제 회의 통역사가 되어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한국어로 노래를 잘 부르려고 해도 노래방에 가서 수십 번 연습을 하지요? 하물며 외국어를 하는 것인데, 자기 성대를 울리지 않고 외국어를 잘할 수는 없습니다. 수십 수백 번 입으로 크게 소리 내어 따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방법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는 데 효과적이다. “저는 요즘도 좋은 글귀가 나오면 줄을 긋고 입으로 한 번 되뇌어 봐요. 한국말이라도 한 번도 입으로 해보지 않은 말은 잘 안 나오거든요. 걸프전 당시 걸프전의 향방이 ‘초미의 관심사’라는 말이 자주 쓰였는데, 처음 그 말을 듣고 되뇌어 보았어요. 그래야 필요할 때 바로 쓸 수 있거든요. 이것을 ‘표현이 입에 붙는다’고 합니다.” 이렇듯 좋은 표현을 많이 체득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비결이라고.외국어의 ‘몸통 찾기’, ‘깃털 찾기’20년 넘게 통역을 해온 최 교수는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기까지 늘 외국어 방송을 틀어 놓는다. 영어권은 CNN과 BBC, 그리고 불어의 경우 F2를 주로 듣는데 이렇게 하면 집중하지 않아도 외국어가 늘 귓가에 맴돈다. 이런 연습을 하면 처음에는 외국어가 단지 소음처럼 들리고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 자연스러운 외국어를 구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외국어의 자연스런 리듬과 멜로디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세세히 신경 쓰지 않고 ‘통’으로 외국어를 듣거나 읽는 것을 최 교수는 ‘몸통찾기’라 이름 붙였다. 시사지나 패션 잡지 등 구미에 맞는 글을 찾아 읽는 것도 좋은 방법. 단, 이 때는 한 권을 떼는데 너무 오래 걸리지 않도록 사전을 찾지 않고 대강의 뜻을 파악하며 읽는다. ‘몸통 찾기’와 병행해야 할 것이 ‘깃털 찾기’. 신문이나 책에서 좋은 글을 골라 핵심 단어를 골라 꼼꼼히 읽고 외우는 과정이다. 듣기 연습으로는 10분 길이의 외국 라디오 방송을 녹음하여 주의 깊게 듣는다. ‘몸통찾기’와는 달리 단어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루 10분, 초급자라면 5분 길이면 적당한데 완벽히 듣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잘 들리기 시작하면 다음엔 받아 적어보라고 한다. 직접 외국인과 부딪쳐서 배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방법. 실제로 그녀도 외대 시절 프랑스인 교수 집에 살다시피 하며 학구열을 불태웠고, 파리 유학 때는 하루는 영어권 다음날은 불어권 친구와 산책하며 모르는 것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내가 외국인인 이상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배짱을 가지고 부딪치라고 최 교수는 강조한다. 긴장은 뇌를 경직시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외국인 공포증을 없애는 것이 외국어 습득의 지름길이라고. 언어는 종합 커뮤니케이션“테니스 선수도 서브를 잘 하기 위해 3만 번 이상 연습한다죠? 외국어도 똑같아요. 반복을 통해서 뇌의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뇌에 ‘금이 진하게 간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반복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 교수는 언어 능력이 종합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말한다. 상대의 말을 분석적으로 들으며,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유창하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쉽게 이해하도록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필수죠. 상대의 눈빛이나 호응을 보면서, 그 눈높이에 맞추어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 교수는 말이 빠르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같은 시간 내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휠씬 많은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나갔다. 남들보다 더 많이 훈련된 언어영역 개발에 의한 것이라 짐작해 본다. “외국어를 잘 하게 되면 많은 사람과 교감할 수 있게 되죠. 삶을 진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최 교수의 휴대폰에는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이 컬러링으로 설정되어 있다. 국가도, 어떤 다름도 초월한 벗을 만드는 비결을 그녀는 외국어에서 찾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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